[In ISSUE] 2025-12-12 오후 12:31:26
[구리가격] '닥터 코퍼' 구리 가격의 상승 '끝물'일까 '시작'일까
금이나 은 가격이 오를 때마다 언론은 화려한 헤드라인으로 관심을 집중시킨다. 반면, 금·은·동 가운데 항상 3등 취급을 받는 구리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곤 한다. 하지만 앞으로의 실물경제를 생각해 보면, 이른바 '닥터 코퍼'(Dr. Copper)로 불리는 구리는 요즘 어떤 자산보다도 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다.
구리는 AI 데이터센터, 전기차, 재생에너지, 노후 전력망 교체 등 대규모 수요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구조적 변곡점에 진입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공급 측면에서도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칠레의 '배짱 가격'에도 중국 다른 선택지 無
공급 측면에서 변화의 시작점은 세계 1위 구리 생산국인 칠레였다. 최근 칠레 국영 광산기업 코델코는 중국 제련사에 장기 공급 계약 프리미으로 톤당 335~350달러를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1년 전만 해도 89달러 선이었던 프리미엄이 거의 네 배 가까이 오른 셈이다.
일반적인 공산품이라면, 수요자가 "그 가격이면 안 사겠다"며 거래를 거부할 수도 있지만, 구리는 선택지가 없다. 현대 산업의 뼈대라고 할 만큼, 전력망, 자동차, 전자제품, 통신 인프라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빠짐없이 쓰이기 때문이다.
구리가 사용되는 산업의 범위는 매우 넓다. 대표적으로 전선 및 케이블, 수도·배관·건설 자재, 변압기 및 송배전 설비, 전기차 모터·배터리, 풍력·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설비 등이 있다.
특히 중국 입장에서 구리 문제는 국가전략산업과 직결된다.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패널처럼 중국이 강점을 가진 산업 대부분이 구리를 대량으로 사용한다. 가격 인상에도 중국이 쉽게 등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런던금속거래소(LME)에서 거래되는 구리 가격은 이미 과거 고점을 넘어섰다. 톤당 1만 달러 선을 뚫고 1만 1천 달러대까지 치솟으며 신고가를 만들고 있다.
'구조적 공급 부족'겪는 구리, 광석 품위 저하가 원인
글로벌 구리 시장에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구조적 공급 부족'(Structural Deficit)이라는 표현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광석 품위(ore grade)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광석 품위란 쉽게 말해 '광석 100개 중 실제로 쓸 수 있는 구리가 얼마나 섞여 있느냐'를 나타내는 비율이다.
전 세계 평균 구리 광석 품위는 1990년만 해도 약 1.2% 수준이었지만, 현재 0.6%대 중반까지 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비해 같은 1톤의 구리를 생산하기 위해 캐내야 하는 광석의 양이 크게 늘어났다는 의미다.
한 연구에 따르면 지난 10여 년 사이 구리 광석의 평균 품위가 25%가량 떨어지는 동안, 동일 생산량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 소비는 40% 이상 증가했다. 더 깊이 파고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해야 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여기에 환경 규제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신규 광산 개발은 더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사업으로 바뀌고 있다.
또 노후 광산과 투자 부족 문제도 겹쳐 있다. 기존 대형 광산의 품위는 계속 하락하고 있지만,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구리는 탐사부터 상업 생산까지 실제로 뽑아내기까지 대략 8~10년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러한 문제가 단기간에 해결되긴 싶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전기 먹는 하마' AI 데이터센터가 부른 구리 쇼크
구리 수요를 끌어올리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건 단연 'AI 데이터센터'다. 뉴스를 통해 자주 접하는 엔비디아의 GPU나, 최근 이슈가 된 구글의 TPU 같은 AI 칩들은 성능이 좋아질수록 전력 소모가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여러 대의 GPU가 동원되는 데이터센터가 '전기 먹는 하마'가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에 기업들은 저전력 설계와 효율 개선에 사활을 걸고 있지만, 여전히 전체적인 전력 수요는 계속 커지고 있다.
'데이터센터 신설 및 증설', '송배전망 확장', '노후 변압기와 케이블 교체' 이 세 가지는 현재진형형인 구리의 대표적인 수요처다. 빅테크 기업들은 해당 분야에 조 단위 투자를 앞다퉈 발표하고 있다. 이는 시장에 있는 구리를 모조리 사용하겠다는 선언과 다를 바 없으며, 결국 지금까지 사용된 구리보다 앞으로 들어갈 양이 훨씬 많아질 것이다.
과거보다 구리를 더 많이 부르는 자동차의 변신
AI 데이터센터가 '신규' 수요 축이라면, 전기차와 재생에너지는 구리 슈퍼사이클을 이끌어온 '기존' 축의 영역이다. 이제는 길거리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전기차 한 대에는 내연기관 차량보다 훨씬 더 많은 구리가 필요하다.
자동차 한 대에 들어가는 구리의 양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내연기관차(ICE): 대당 약 8~22kg
· 하이브리드차(HEV): 대당 약 40kg
· 순수 전기차(BEV): 대당 약 83kg 내외(내연기관 대비 약 3.8~4배)
· 전기 버스: 대당 300kg 이상
전기차의 구리 사용량 증가에 대해 반론하는 의견도 있다. 기술 발전으로 전기차 1대당 사용되는 구리양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일부 연구에서는 배터리 전기차(BEV)의 대당 구리 사용량이 2015년 약 99kg 수준에서 2030년 60kg대까지 감소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전체 시장을 보면 대당 구리 사용량 감소보다 전기차 생산 대수 증가 효과가 더 크다. 실제로 한 보고서에서는 2024년 대비 2030년 전기차 관련 구리 수요가 두 배 이상 증가해 약 250만 톤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구리 슈퍼사이클 현재진행형' 금은동 중 가장 많이 사용되는 원자재
구리를 생산하거나 제련해서 다시 가공하는 기업들은 이제 구리 가격을 고객에게 부담시키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AI라는 새로운 문명이 발전하려면 막대한 양의 전기가 필요하고, 그 전기를 흐르게 하는 '혈관' 역할은 여전히 구리가 맡고 있다.
지금의 구리 가격 상승은 중국과 칠레 간의 일시적인 힘겨루기나, 투기 세력의 영향만으로 설명하기엔 '산업의 변화'가 너무 거세다. 이에 구리 생산·제련 업체들이 가격 인상분을 점점 더 시장에 그대로 전가할 수 있게 됐다.
금은 대표적인 안전자산이고, 은은 안전자산에 산업재로서의 가치까지 인정받고 있다. 이제 동(구리) 역시 새로운 구조적 변화를 맞으면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 구리는 비록 상징적으로는 3등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실제 시장에서 평가받는 가치는 그 이상임을 보여주고 있다. 구리의 슈퍼사이클은 여전히 현재 진행 중이다.